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처녀지 개간 운동 (문단 편집) == 배경 == [[이오시프 스탈린]]의 뒤를 이어 [[소련]] [[서기장]]이 된 [[니키타 흐루쇼프]]는 하루 빨리 [[미국]]을 따라잡고 싶어 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통치하던 시기의 소련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지만 [[잉여]] 생산물을 극한까지 [[착취]]하여 모두 공업화에 쏟아붓는 가혹한 통치에 [[경공업]]의 미발달과 [[제2차 세계 대전]]의 후유증으로 인해 [[소비재]]가 부족했고 특히 [[농업]]의 황폐화가 심각하여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가서 [[식료품]]을 사 오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질 지경이었다. 스탈린 생전에는 아무도 이런 정책에 [[대숙청|찍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스탈린이 죽고 나서 소련의 정치가들은 단순히 정치적 탄압을 중단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 어느 정도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니 인민들을 극한까지 [[수탈]]하는 정책을 중단하고 인민들의 욕구 충족에 더 힘을 기울여서 여유 있게 먹고 살만한 나라로 만들어야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생각은 [[게오르기 말렌코프]]와 [[라브렌티 베리야]]에게서 시작되었고 흐루쇼프도 마찬가지였다. 흐루쇼프는 동료 경쟁자들과 함께 베리야를 처단한 뒤 스탈린 시절 황폐화되었던 농업의 진흥을 위해서 그간 개발되지 않았던 오지 지역을 개간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흐루쇼프는 당시 소련 농무부 장관을 지냈던 로비노프와 여타 농업 관계자들과 함께 농업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방법을 고심했고 그 대상으로 물색한 것이 북부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카자흐스탄]], 남 [[시베리아]], 북[[캅카스]], [[우랄 산맥]]의 방치되었던 땅을 농경지로 개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늘어난 곡물 생산량을 이용해 목초와 [[곡물]]을 [[가축]]들을 먹여살리는 데 쓰기까지 한다면 소련의 식료품 부족 문제까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매년 1800~1900만 톤의 곡물을 수확한다는 가정 하에 1200만 [[헥타르]]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처녀지 개간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사실 이렇게만 본다면 그냥 무식하게 처녀지 개간작업만 밀어붙인 것 같지만 사실 농민들에게 지급할 [[임금]]과 [[연금]]을 늘리고 [[여권]]도 발급받게 만들어서 [[국내여행]]을 자유롭게 하는 등[* [[소련]]을 포함한 [[공산권]] 국가들에선 국내여행을 위한 국내 여권을 따로 발행했다. 자세한 내용은 [[여행증]] 문서를 참고할 것.] 2등 시민 취급을 받은 농민들의 지위를 향상시켜 [[생산성]]을 높이는 작업도 병행했다. 즉, 처녀지 개간 사업 자체는 농촌진흥계획의 일부였다. 물론 가장 신경 쓴 사업이기는 하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